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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폴 민족성 말살
Cultural Eradication in Constantinopol
파일:콘스탄티노폴_문화말살.webp
시행 시기
1969년 ~ 1985년
시행 지역
콘스탄티노폴 전역
루이나령 콘스탄티노폴 자치구 (1979~1985)
유형
폭력적 문화말살 / 민족 정체성 말소 정책
주관 기관
루이나 민정이양위원회
┗ 내무부 치안행정국
┗ 교육부 식민지역지도국
┗ 군정청 콘스탄티노폴 지부
표면 명분
자치구 치안 회복 및 통합적 시민교육 확대
주요 내용
언어 말살
콘스탄티노폴-빌베른어 사용자 대상 벌금, 체포, 공개 구타
교육기관·공공장소에서 영어 외 사용 시 즉결처벌
학교 파괴
학교 112곳 강제 폐쇄 및 교사 구금
학생들 집단 전출, 일부 학교는 전소되거나 병영화
문화재 파괴
박물관, 사원, 묘지, 문화공원 등 폭격·불도저 철거
저항 인물 동상은 폭파, 예술품은 약탈 후 소각 처리
토착 종교 탄압
빌베른 파가니즘 신전 강제 철거, 사제단 다수 공개 처형
제사 의식 금지, 예배 중 단속 및 폭력 진압 다수 보고
피해 양상
토착 언어 단절, 종교 지도층 궤멸, 지역 정체성 파괴
노인 세대의 자살 급증
정책 방식
물리적 진압과 고문, 강제수용소 수용, 공공장소에서의 모욕·처벌을 통한 공포통치 병행
사상자 규모
사망 7,000명 이상, 실종자 19,500여 명 추산
문화 탄압 과정 중 민간인 구타·총살 사례 다수 확인
국제 반응
인권단체 "문화유산 파괴를 넘어선 계획적 민족 말살"
유엔 인권위 조사단 파견 요구 있었으나 거부됨
언어를 빼앗으면 구호를 외칠 수 없고, 신전을 빼앗으면 모일 곳이 없으며, 기억을 빼앗으면 싸울 이유가 없다.

민정이양위원회 내부 문건 「통합 시민화 기본 방침」(1969년 12월), 이른바 「들로름 각서」의 한 구절
할머니는 루이나 말을 끝내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마지막 16년 동안 집 밖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폴 출신 작가의 회고록에서

1. 개요2. 명칭3. 배경
3.1. 빌베른계와 혼혈계3.2. 1969년 쿠데타와 루이나의 침공3.3. 점령 행정의 논리
4. 전개
4.1. 제1기: 언어와 학교 (1969~1973)4.2. 제2기: 신전과 사제단 (1973~1977)4.3. 제3기: 정리 작전과 수용소 (1978~1981)4.4. 제4기: 자치구 시기 (1981~1985)
5. 주요 내용
5.1. 언어 말살5.2. 학교 파괴5.3. 문화재 파괴5.4. 토착 종교 탄압5.5. 공포 통치
6. 피해7. 국제 반응8. 루이나 내 반응과 진상 규명9. 영향10. 평가11. 연표12. 주요 인물13. 여담14. 관련 문서


1. 개요 [편집]

1969년부터 1985년까지 루이나가 점령한 콘스탄티노폴에서 벌어진 빌베른계 주민의 언어·종교·교육·문화유산에 대한 조직적 말살 정책. 루이나 민정이양위원회가 「통합 시민화」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내무부 치안행정국, 교육부 식민지역지도국, 군정청 콘스탄티노폴 지부가 집행했고, 1981년 루이나군이 철수한 뒤에는 루이나령 콘스탄티노폴 자치구 정부가 루이나 고문단의 지도 아래 1985년까지 이어갔다.

정책의 표적은 구시가와 북부에 사는 빌베른계 주민이었다. 루이나 당국은 빌베른계의 언어인 콘스탄티노폴-빌베른어의 공적 사용을 금지하고 영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강제했으며, 빌베른계 학교 112곳을 폐쇄하고, 빌베른 파가니즘의 신전을 철거하고 사제단을 처형했다. 반면 조차지 시절 노동자 후손인 혼혈계 주민에게는 교육과 행정직, 치안 조직에서 우선권을 주었다. 이 분할 통치는 1974~1977년 두 집단 사이의 「구역 전쟁」을 부추겼다.

16년 동안 7,000명 이상이 숨지고 19,500여 명이 실종되었다. 그러나 이 정책의 가장 깊은 결과는 숫자로 드러나지 않는다. 가정에서 콘스탄티노폴-빌베른어를 쓰는 주민의 비율은 1968년 78%에서 1990년 31%로 떨어졌고, 빌베른 파가니즘은 사제단이 궤멸하면서 의례를 이어갈 사람을 잃었다. 오늘날 콘스탄티노폴 주민 다수가 종교가 없다고 답하는 것, 그리고 '콘스탄티노폴인'이라는 통합된 정체성이 끝내 형성되지 못한 것은 이 정책과 떼어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루이나 정부는 이 정책을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민족 말살'로 인정하지 않았다. 루이나의 공식 기록은 이를 「점령기 치안 및 교육 정책」의 일부로 다루며, 과잉 집행이 있었다는 점만 인정하고 있다.

2. 명칭 [편집]

루이나 당국의 공식 명칭은 「통합 시민화 계획」이었다. 민정이양위원회 문서에서는 「시민통합 교육」, 「공용어 정착 사업」, 「종교시설 정비」 같은 행정 용어가 쓰였고, 정책 전체를 가리키는 단일한 이름은 없었다.

빌베른계 주민들은 이 시기를 「침묵의 16년」이라고 부른다. 공공장소에서 자기 말을 할 수 없었던 경험에서 나온 이름이다. 1990년대 이후 국제 인권단체와 연구자들은 「콘스탄티노폴 민족성 말살」 또는 「콘스탄티노폴 문화 말살」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루이나에서는 진보 언론과 학계가 이 명칭을 쓰는 반면, 보수 언론과 정부는 「점령기 동화 정책」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3. 배경 [편집]

3.1. 빌베른계와 혼혈계 [편집]

콘스탄티노폴은 1,000년 넘게 빌베른의 한 지방으로 존재했다. 구시가와 북부에는 빌베른어를 쓰고 빌베른 파가니즘을 믿는 빌베른계 주민이 대대로 살았다. 19세기 후반 빌베른 공화정이 무너지고 루이나를 비롯한 9개국이 조차지를 설정하면서 도시의 약 40%가 외국 영토가 되었고, 조차지 항만과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각지에서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의 후손이 혼혈계로, 그리스어·스페인어·부르고어·영어 등을 쓰며 옛 조차지 구역에 모여 살았다.

두 집단 사이에는 오래된 긴장이 있었다. 빌베른계는 혼혈계를 조차지의 앞잡이로 보았고, 혼혈계는 빌베른계를 폐쇄적인 구시가의 토박이로 보았다. 조차지와 주민 사이를 중개하던 이른바 「열두 집」 매판 가문들은 대부분 혼혈계였다.

1959년 3월 혁명으로 들어선 인민혁명정부는 조차지를 일괄 회수하고 빌베른계를 중심으로 국가를 재편했다. 빌베른 파가니즘의 신전은 혁명 이후 무신론을 표방한 정부 아래서도 민족 전통의 상징으로 보호받았고, 빌베른계에게 신전은 종교 시설인 동시에 마을 회의와 교육, 상호부조가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3.2. 1969년 쿠데타와 루이나의 침공 [편집]

1969년 4월 인민군 사령관 야니스 브론다키스와 디미트리 사카렐리스 계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레안드로스 모라이티스 수상을 감금했다. 10월 19일 모라이티스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군이 진압하면서 민간인 40~120명이 숨졌다. 이른바 「10월 학살」이다.

루이나는 학살을 명분으로 개입했다. 10월 28일 아서 W. 그랜트 대통령의 승인 아래 약 3만 8천 명의 병력이 투입된 「새벽 파수 작전」이 시작되었고, 11월 18일 루이나는 주요 전투의 종료를 선언했다. 12월에는 필리프 A. 들로름을 초대 위원장으로 하는 민정이양위원회가 출범해 점령 행정을 맡았다.

3.3. 점령 행정의 논리 [편집]

점령 초기 루이나군을 가장 괴롭힌 것은 구시가의 무장 저항이었다. 저항 조직의 대부분은 빌베른계였고, 이들은 신전을 집회 장소로, 빌베른계 학교를 연락망으로, 콘스탄티노폴-빌베른어를 루이나 통역관이 알아듣지 못하는 암호처럼 썼다.

민정이양위원회는 이 저항의 뿌리를 빌베른계의 정체성 자체에서 찾았다. 1969년 12월 위원회가 작성한 「통합 시민화 기본 방침」, 흔히 「들로름 각서」라 불리는 내부 문건은 "저항은 무기가 아니라 언어와 신전과 학교에서 자란다"고 진단하고, 빌베른계를 영어를 쓰는 「통합 시민」으로 바꾸는 것을 점령 정책의 장기 목표로 제시했다. 각서는 혼혈계를 "조차지 시대부터 루이나 문화에 익숙한 협력 가능 집단"으로 분류하고 이들을 통합 시민화의 모범이자 집행 인력으로 활용할 것을 권고했다.

각서가 영어를 공용어로 택한 이유는 루이나의 공용어이자 조차지 시절 혼혈계가 쓰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각서는 영어를 "어느 민족의 말도 아닌 중립 언어"라고 불렀지만, 빌베른계 주민에게 영어는 점령자와 조차지의 언어였다.

4. 전개 [편집]

4.1. 제1기: 언어와 학교 (1969~1973) [편집]

1969년 12월 15일 민정이양위원회는 포고 제9호 「공용어에 관한 포고」를 공포했다. 관공서와 법원, 학교, 시장, 대중교통 등 모든 공공장소에서 영어 외의 언어 사용을 금지하고, 위반자에게 벌금을, 재범자에게 구류를 부과하는 내용이었다. 단속은 내무부 치안행정국 산하에 새로 만든 「공용어 감시반」이 맡았는데, 감시반원의 대부분은 영어를 할 줄 아는 혼혈계 청년들이었다.

1970년부터는 간판과 지명이 바뀌었다. 구시가의 거리 이름은 루이나식 영어 이름으로 바뀌었고, 해협의 공식 표기도 이때 포틸락스로 바뀌었다. 1971년 교육부 식민지역지도국은 「교육 통합령」을 내려 모든 학교의 수업 언어를 영어로 정하고, 교사들에게 영어 검정 시험을 치르게 했다. 검정에 떨어진 빌베른계 교사들은 해고되었고, 해고에 항의하거나 몰래 빌베른어 수업을 이어간 교사들은 구금되었다.

4.2. 제2기: 신전과 사제단 (1973~1977) [편집]

1973년 민정이양위원회는 「종교시설 등록령」을 공포해 모든 신전에 등록을 의무화했다. 등록 조건은 제사를 영어로 진행하고 치안행정국의 참관을 받아들이는 것이었고, 등록하지 않은 신전에서의 모임은 불법 집회로 처벌되었다. 빌베른 파가니즘 사제단 대부분은 등록을 거부했다.

1974년 칼라미 시장에서 폭탄이 터져 211명이 숨지자 민정이양위원회는 빌베른계 무장 조직 「신전 수호단」을 배후로 지목하고, 신전을 무장 저항의 거점으로 규정해 대대적인 철거에 나섰다. 이른바 「신전 정비 작전」으로 1974년부터 1976년까지 약 410곳의 신전 가운데 340곳이 불도저로 철거되었다. 체포된 사제들은 군사법정에서 반란 선동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이 가운데 186명이 구시가 광장에서 공개 처형되었다.[1]

같은 시기 치안행정국은 혼혈계 청년들로 「구역 자경단」을 조직해 무기를 지급했다. 자경단은 빌베른계 구역의 경계를 순찰하며 공용어 단속과 가택 수색을 도왔고, 빌베른계 무장 조직과 충돌하면서 1974~1977년 구역 전쟁으로 번졌다. 구시가와 옛 조차지 구역 사이에는 이때 콘크리트 장벽이 세워졌다. 1975년부터 1977년까지는 특무처가 이른바 「더러운 전쟁」을 벌여, 숨어서 제사를 이어가던 사제들과 빌베른어로 시를 쓰던 작가, 비밀 학교를 운영하던 교사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4.3. 제3기: 정리 작전과 수용소 (1978~1981) [편집]

1978년 2월 19일 루이나군은 빌베른계 피난민 420여 명이 머물던 베르자 구역의 옛 호텔을 봉쇄한 뒤 포격해 216명 이상을 숨지게 했다. 조작된 첩보를 근거로 한 이 다조 빌딩 학살은 곧이어 벌어질 대규모 작전의 전조였다. 몇 달 뒤 루이나 본국에서 군정이 들어서자 콘스탄티노폴의 점령 행정도 군정청 콘스탄티노폴 지부가 주도하게 되었다. 1978년부터 1979년까지 벌어진 「정리 작전」에서 군정청은 빌베른계 구역을 차례로 봉쇄하고 16세 이상 남성을 대거 연행했다. 연행자들은 알티노 구금시설을 비롯한 4곳의 수용소에 수용되어 영어와 루이나 시민 교육으로 이루어진 「재교육 과정」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고문과 구타가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정리 작전 기간에만 약 2만 3천 명이 연행되었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1979년 루이나는 자치정부 헌법을 공포해 콘스탄티노폴을 「루이나령 콘스탄티노폴 자치구」로 재편하고 대통령제를 도입했다. 첫 선거에서 혼혈계 정치인 테오도로스 마니아티스가 당선되었으나, 빌베른계 대부분이 선거를 거부해 투표율은 23%에 그쳤다. 자치정부 헌법 제4조는 영어를 자치구의 유일한 공용어로 명시했다. 1980년 루이나 본국에서 10.24 시민혁명으로 군정이 무너지자, 1981년 2월 루이나 의회는 철수 결의를 가결했고 루이나군은 콘스탄티노폴에서 물러났다.

4.4. 제4기: 자치구 시기 (1981~1985) [편집]

루이나군은 떠났지만 정책은 끝나지 않았다. 내무부와 교육부에서 파견된 약 400명의 루이나 고문단이 자치정부에 남았고, 자치정부는 1982년 「공용어법」을 제정해 포고 제9호의 내용을 자치구 법률로 옮겼다. 폭력의 강도는 점령기보다 약해졌지만, 공용어 단속과 빌베른계 학교 금지, 신전 재건 불허는 그대로 이어졌다. 이 시기 정책을 집행한 것은 루이나 군인이 아니라 혼혈계가 주축이 된 자치구 경찰이었다는 점에서, 빌베른계 주민에게 이 4년은 점령기보다 오히려 더 깊은 상처로 기억된다.

1985년 구역 간 무력 충돌이 다시 격화되면서 마니아티스의 자치정부는 무너졌다. 자치구 행정이 사라지자 공용어법을 집행할 기관도 사라졌고, 16년에 걸친 정책은 공식 폐지 절차 없이 사실상 끝났다. 이후 콘스탄티노폴은 명목상 루이나 보호령으로 남은 채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5. 주요 내용 [편집]

5.1. 언어 말살 [편집]

콘스탄티노폴-빌베른어는 빌베른 본토의 빌베른어에서 갈라져 나온 방언으로, 해협 특유의 어휘와 발음을 가진 빌베른계 주민의 일상 언어였다. 포고 제9호 이후 이 말을 공공장소에서 쓰는 것은 범죄가 되었다.

단속은 벌금과 구류에 그치지 않았다. 공용어 감시반은 시장이나 거리에서 빌베른어를 쓴 주민을 그 자리에서 구타했고, 재범자는 목에 「나는 공용어를 어겼다」는 영어 팻말을 걸고 광장에 세워 두는 공개 모욕 처벌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빌베른어를 쓴 학생에게 나무 패를 목에 걸게 하고, 다른 학생이 빌베른어를 쓰는 것을 적발해야만 패를 넘길 수 있게 했다. 이 「침묵패」는 아이들끼리 서로를 감시하게 만들었고, 오늘날 빌베른계 사회에서 이 시기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다.

1976년부터는 주민 등록부의 이름도 바뀌었다. 신규 출생 신고와 신분증 갱신 때 빌베른식 이름은 영어식으로 고쳐 적혔고, 빌베른어 철자를 고집하는 주민에게는 신분증 발급이 미뤄졌다.

5.2. 학교 파괴 [편집]

1970년부터 1976년까지 빌베른계 학교 112곳이 강제로 폐쇄되었다. 학생들은 옛 조차지 구역에 새로 세운 「통합 학교」로 집단 전출되었는데, 통학 거리가 멀고 구역 전쟁 시기에는 등굣길이 곧 경계선을 넘는 길이었기 때문에 많은 빌베른계 아이들이 학교를 그만두었다. 폐쇄된 학교 가운데 23곳은 불에 타거나 루이나군 병영으로 전용되었다.

교사들은 가장 먼저 표적이 되었다. 점령기 동안 빌베른계 교사 약 1,900명이 해고되었고, 이 가운데 600여 명이 비밀 수업이나 항의를 이유로 구금되었다. 구금된 교사 가운데 일부는 정리 작전 시기 수용소에서 숨졌다. 빌베른계 공동체는 가정과 지하실에서 비밀 학교를 운영하며 아이들에게 빌베른어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는데, 이런 비밀 학교는 점령기 내내 특무처와 치안행정국의 주요 단속 대상이었다.

5.3. 문화재 파괴 [편집]

문화재 파괴는 신전에 그치지 않았다. 1975년 구시가의 콘스탄티노폴 시립박물관이 「저항 조직의 은신처」라는 이유로 폐쇄된 뒤 철거되었고, 빌베른계 묘지 여러 곳이 도로 확장과 병영 건설을 명분으로 불도저로 밀렸다. 1959년 혁명 지도자들과 빌베른 통치기 인물들의 동상은 폭파되었고, 문화공원은 루이나군 주둔지로 바뀌었다.

박물관과 신전의 유물 상당수는 약탈되었다. 일부는 「반란 선전물」로 분류되어 소각되었고, 일부는 루이나군 장교와 민정이양위원회 관계자들을 통해 루이나 본국으로 흘러갔다. 1990년대 이후 루이나의 개인 소장품과 경매 시장에서 콘스탄티노폴 신전의 유물이 잇따라 발견되면서 반환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반환된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5.4. 토착 종교 탄압 [편집]

빌베른 파가니즘은 빌베른의 전통 다신교로, 콘스탄티노폴에서는 고대 그리스계 항해민의 해협 신앙과 섞여 독자적인 형태로 이어져 왔다. 콘스탄티노폴의 신전은 해협을 굽어보는 언덕과 구시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계절마다 해협의 신들에게 올리는 제사는 빌베른계 공동체의 가장 큰 행사였다.

탄압은 신전과 사제, 의례를 차례로 겨눴다. 종교시설 등록령으로 신전을 불법화한 뒤 신전 정비 작전으로 건물을 없앴고, 사제들을 처형하거나 구금했으며, 가정에서 올리는 제사까지 불법 집회로 단속했다. 1969년 약 1,200명이던 사제단 가운데 1985년까지 살아남아 콘스탄티노폴에 남은 사람은 90여 명에 불과했다. 빌베른 파가니즘은 경전보다 사제에서 사제로 전해지는 구전과 의례에 기대는 종교였기 때문에, 사제단의 궤멸은 곧 의례 전승의 단절을 뜻했다.

5.5. 공포 통치 [편집]

정책 전체를 떠받친 것은 공포였다. 공개 구타와 공개 모욕, 광장에서의 공개 처형은 모두 주민들이 보도록 계획된 것이었다. 들로름 각서는 "처벌은 당사자보다 구경꾼을 위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정리 작전 시기의 수용소는 재교육 시설을 표방했지만,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문과 굶주림, 즉결 처형이 이루어진 강제수용소였다.

6. 피해 [편집]

항목
규모
사망
7,000명 이상
실종
약 19,500명
구금 누계
약 61,000명
폐쇄 학교
112곳
철거 신전
약 340곳
공개 처형 사제
186명

사망자 7,000여 명은 공개 처형과 즉결 처형, 수용소 내 사망, 시위 진압 과정의 사망, 구역 전쟁 중 민간인 사망을 합한 수치다. 실종자 19,500여 명의 대부분은 정리 작전 시기 연행된 뒤 행방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로, 1990년대 이후 알티노 구금시설 인근에서 여러 차례 집단 매장지가 발견되었지만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일부에 그친다.

언어와 공동체의 피해는 더 오래 남았다. 가정에서 콘스탄티노폴-빌베른어를 쓰는 주민의 비율은 1968년 78%에서 1990년 31%로 떨어졌고, 1970년대에 학교를 다닌 세대 상당수는 빌베른어를 알아듣기만 할 뿐 읽고 쓰지 못한다.

노인 세대의 피해도 컸다. 영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던 빌베른계 노인들은 공공장소에서 입을 열 수 없게 되었고, 신전과 제사가 사라지면서 공동체 안에서의 역할도 잃었다. 1975년부터 1984년까지 구시가 60세 이상 인구의 자살률은 점령 이전의 네 배 가까이로 치솟았다. 생존자 증언집에는 말을 잃은 채 집 안에서만 지내다 세상을 떠난 노인들의 이야기가 반복해서 나온다.

7. 국제 반응 [편집]

1976년 한 국제 인권단체는 보고서에서 이 정책을 "문화유산 파괴를 넘어선 계획적 민족 말살"이라고 규정했다. 1978년 빌베른과 몇몇 나라가 유엔 인권위원회에 조사단 파견을 요구했지만, 루이나는 점령지 치안 문제라는 이유로 조사단의 입국을 거부했다.

빌베른 정부는 콘스탄티노폴의 빌베른계 주민을 동포로 여기며 여러 차례 항의했으나, 니에미이 금융조약 체제 아래 루이나에 재정적으로 묶여 있던 처지에서 항의 이상의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사비에트는 이 정책을 루이나의 제국주의를 보여 주는 사례로 대외 선전에 적극 활용했다.

8. 루이나 내 반응과 진상 규명 [편집]

점령기 동안 루이나 국내에서 이 정책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점령지 보도는 군 당국의 통제를 받았고, 1970년대 루이나 사회는 검은 10년의 혼란 속에 있었다. 콘스탄티노폴 문제를 다룬 소수의 기사는 대부분 구역 전쟁의 폭력을 빌베른계와 혼혈계의 해묵은 민족 갈등으로 설명했다.

1981년 정보기관 조사위원회는 특무처의 활동을 조사하면서 콘스탄티노폴의 「더러운 전쟁」 일부를 확인했다. 그러나 위원회의 조사 범위는 정보기관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민정이양위원회와 내무부·교육부가 주도한 언어·교육·종교 정책은 조사 대상에서 빠졌다. 정책의 가해 구조 대부분이 정보기관이 아닌 일반 행정기관이었다는 점이 도리어 조사를 피하는 이유가 된 셈이다.

정책의 전모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 생존자 증언이 쌓이고 들로름 각서 사본이 공개되면서부터다. 루이나의 진보 언론과 학계는 이를 「콘스탄티노폴 민족성 말살」로 부르며 정부의 공식 인정과 사과, 유물 반환을 요구해 왔다. 루이나 정부는 과잉 집행이 있었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정책의 목적이 치안 회복과 시민 교육이었다는 공식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9. 영향 [편집]

오늘날 콘스탄티노폴에 '콘스탄티노폴인'이라는 통합된 정체성이 없는 것은 이 정책의 직접적인 결과로 평가된다. 빌베른계와 혼혈계를 갈라 한쪽을 지우고 다른 쪽을 우대한 16년은 두 집단이 하나의 공동체로 합쳐질 가능성을 없앴다. 구역 전쟁 때 세워진 장벽의 상당수는 지금도 남아 있으며, 무정부 상태의 콘스탄티노폴에서 각 구역은 사실상 별개의 공동체로 살아간다.

종교 지형도 바뀌었다. 신전과 사제단을 잃은 빌베른 파가니즘은 가정에서 드리는 작은 의례로만 남았고, 오늘날 콘스탄티노폴 주민 다수는 종교가 없다고 답한다. 영어는 루이나가 떠난 뒤에도 구역 사이의 공통어로 살아남아, 콘스탄티노폴의 여러 공용어 가운데 하나로 쓰이고 있다.

이 정책은 빌베른의 반루이나 감정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빌베른 민족주의 세력은 콘스탄티노폴의 경험을 루이나 지배의 본질을 보여 주는 사례로 거듭 인용했고, 이는 이후 아작스 작전과 빌베른 침공을 둘러싼 빌베른 여론에도 영향을 주었다.

10. 평가 [편집]

이 정책을 '민족 말살'로 볼 수 있는지는 루이나 안팎에서 논쟁거리다. 루이나 정부와 보수 학계는 이것이 무장 저항을 진압하기 위한 점령 정책이었고, 인명 피해 대부분은 대반란 작전과 구역 전쟁의 결과였다고 본다. 반면 비판자들은 들로름 각서가 빌베른계의 정체성 자체를 제거 대상으로 명시했고, 폭력이 저항 조직이 아니라 언어와 학교, 신전, 노인과 아이들을 향했다는 점을 들어 의도된 민족 말살이었다고 주장한다.

국제법상의 쟁점도 있다. 집단살해를 규정한 국제 협약은 신체적 말살을 중심에 두고 있어, 언어와 종교, 문화를 없애는 이른바 '문화적 집단살해'는 법적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콘스탄티노폴의 사례는 이 공백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11. 연표 [편집]

* 1969년 4월 — 브론다키스·사카렐리스 계파 쿠데타
* 1969년 10월 19일 — 10월 학살
* 1969년 10월 28일 — 루이나, 새벽 파수 작전 개시
* 1969년 12월 — 민정이양위원회 출범, 「통합 시민화 기본 방침」 작성
* 1969년 12월 15일 — 포고 제9호 「공용어에 관한 포고」
* 1971년 — 「교육 통합령」
* 1973년 — 「종교시설 등록령」
* 1974년 — 칼라미 시장 폭탄테러, 신전 정비 작전 시작, 구역 전쟁 발발
* 1975~1977년 — 특무처의 「더러운 전쟁」
* 1976년 — 주민 등록부 이름 영어화
* 1978년 2월 19일 — 다조 빌딩 학살
* 1978~1979년 — 정리 작전
* 1979년 — 자치정부 헌법 공포, 루이나령 콘스탄티노폴 자치구 출범
* 1981년 2월 — 루이나군 철수
* 1982년 — 자치구 「공용어법」 제정
* 1985년 — 자치정부 붕괴, 정책 사실상 종료

12. 주요 인물 [편집]

인물
직위
역할
루이나 대통령
침공 승인
필리프 A. 들로름
민정이양위원회 위원장
기본 방침 수립
마거릿 H. 콜리어
교육부 식민지역지도국장
교육 통합령
에드거 L. 멘도사
내무부 치안행정국장
공용어 단속·자경단
테오도로스 마니아티스
자치구 대통령
공용어법

13. 여담 [편집]

* 「침묵패」의 실물 몇 점은 지금도 구시가 주민들이 보관하고 있다. 패에는 영어로 "I SPOKE VILLVERENNE"라고 새겨져 있다.
* 들로름 각서가 영어를 "어느 민족의 말도 아닌 중립 언어"라고 부른 대목은, 루이나 안에서 이 정책을 비판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 해협의 공식 표기가 포틸락스로 바뀐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빌베른계 주민들은 지금도 해협을 옛 이름으로 부른다.
* 1974년 철거된 해협 언덕의 대신전 터는 이후 루이나군 통신 시설로 쓰이다가, 현재는 루이나인 거주지를 지키는 플라자 그룹의 경비 초소가 들어서 있다.

14. 관련 문서 [편집]

[1] 칼라미 시장 폭탄테러의 배후는 지금도 확정되지 않았다. 신전 수호단은 관련성을 부인했고, 일부 연구자들은 당시 콘스탄티노폴에서 활동하던 특무처의 개입 가능성을 제기한다.